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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칼럼

비운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입매

입력 2014.06.23 00:00
  • 송상훈·HiDoc 전문의

“행복이란 결핍과 풍요 사이 그 어디쯤에 존재하는 간이역이다”(채닝 폴락)

프랑스 신고전주의 화가(Neoclassical painter)인 르브룅은 미모와 뛰어난 재능을 겸비했던 여성화가로, 그 당시 성차별을 극복하고 루이 16세 시절 궁정 전속화가로 활동하며 역사화와 풍경화를 그리기도 했으나 주로 초상화(여인과 아이들의 초상화)에 집중했다.

1776년에 어머니의 강압으로 아마추어 화가이자 화상이었던 장 밥티스트(J. B. P. 르브룅)와 결혼하였으며, 24세 때(1779) 베르사유 궁전에 초대되어 왕비의 초상화를 그리게 되면서 앙투아네트의 총애를 받아 궁정 전속 화가로 활동하게 된다. 평생 마리 앙투아네트 초상화를 25점 가량 그렸다고 한다.

르브룅은 자신을 모델로 한 자화상을 많이 그렸으며, 남편과 플랑드르(벨기에)로 여행을 가서 루벤스와 반 다이크(Van Dyck)의 작품을 보면서 대가들이 구사했던 빛과 색채 사용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녀의 자화상은 자연광이 인체에 비치면서 얼굴이 반사되어 은근히 드리워진 그림자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것은 150여 년 전에 루벤스가 그렸던 오른쪽 여자 초상화와 비슷한 풍으로 그려, 그들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마리 앙투아네트마리 앙투아네트

△ 마리 앙투아네트(Marie-Antoinette), 마리 루이스 엘리자베스 비제-르브룅(Marie Louise Elisabeth Vigee-Lebrun) 작품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마리 앙투아네트(1755 빈 출생~1793 파리 사망)는 1770년 프랑스 루이 15세의 손자 루이 왕세자와 결혼하여 루이 16세의 왕비가 된다. 그녀는 내성적이며 말이 없는 성격의 남편과 달리 사교적인 성격으로 궁정에서 자주 파티를 열고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가진 인물이었다.

하지만 사치스런 생활로 인한 궁정재정의 낭비는 곧 프랑스가 막대한 빚을 지게 만들었다. 이러한 왕비의 방탕한 생활에 시민들은 분노하여, 그녀가 추기경과 불륜관계라는 소문을 확산시켰고, 왕실의 명예는 추락하게 되었다.
1789년 혁명 세력의 인질로 잡혔다가 탈출을 시도했으나 도중에 다시 잡혀 파리로 돌아온 그녀는 신성 로마제국 황제인 오빠에게 프랑스와 전쟁을 일으켜 자신을 살려달라고 편지를 보냈지만 발각되어 오히려 프랑스인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결국 왕정 타도 후 1793년 1월 루이 16세가 처형된 뒤 그해 10월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앙투아네트의 그림은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하지만 그 그림들에는 공통적인 하나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넓은 이마와 긴 턱이 대칭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얼굴 전체가 길기도 하지만 이마와 아랫입술에서 턱선까지 길이가 유난히 긴 것이다. 그녀는 유순한 눈과 오뚝한 코, 감미로운 입술과 입매로 인해 순수함의 매력을 부인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자연스러운 얼굴과 백치미적인 요부의 모습을 지닌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아마도 넓은 이마와 긴 턱으로 인한 부조화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얼굴을 가졌어도 조화와 균형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아름다움이라고 말할 수 없다. 눈매 못지않게 중요한 입매를 미소 짓는 형태로 만들어 주는 입매성형은 첫 인상을 좋게 만들어 주며 전체적인 관상도 긍정적으로 변화시켜준다. 무턱과 팔자주름의 교정, 인중축소나 확대, 입술축소나 확대, 입꼬리수술 등 입 주위를 동시에 교정할 경우 더욱 새로운 모습을 기대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하나의 큰 변화만이 전체를 바꿀 수 없을 때가 있다.
오히려 작은 변화, 그것이 조화와 균형을 가져다주는 것임을 새삼 깨닫게 하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입매수술과 더불어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시술인 리프팅과 쁘띠성형이 필요한 것이다.

유월의 가슴시린 날, 난 풍요와 결핍사이의 간이역에서 무작정 그를 기다릴 것이다. 조화와 균형이라는 단어를 주절거리면서...

<글 = 골든뷰성형외과 송상훈 원장 (성형외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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